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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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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프로스 정교회는 키프로스 섬의 기독교 교회로, 사도 바울로와 바르나바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로마 시대부터 역사를 이어왔다.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독립을 승인받았으며, 아랍의 침략, 십자군 시대, 오스만 제국 통치, 영국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1960년 키프로스 공화국 독립 이후, 마카리오스 3세 대주교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터키의 침공으로 교회는 큰 시련을 겪었다. 현재 키프로스 정교회는 17명의 시노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키프로스의 종교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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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정교회
지도
기본 정보
키프로스 교회의 문장
키프로스 교회의 문장
공식 명칭Εκκλησία της Κύπρου (그리스어)
로마자 표기Ekklisia tis Kyprou
다른 이름Kıbrıs Kilisesi (튀르키예어)
분류동방 정교회
소속그리스 정교회
신학동방 정교회 신학
정치 체제주교제
언어코이네 그리스어
본부니코시아, 키프로스
관할 지역키프로스
설립자사도 바르나바
설립 시기로마 키프로스 시대
독립431년 또는 그 이전
인정431년 (에페소스 공의회), 478년 (로마 제국)
교세838,897명
웹사이트키프로스 정교회 공식 웹사이트
조직
수장 직함총대주교
현임 수장게오르기오스 3세
수도원 수67개

2. 교회 역사

사도 바울로바르나바 등과 함께 키프로스기독교를 전파하면서 키프로스 정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2][3][4] 초기에는 살라미스를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했으며, 4세기 말에는 섬 전체로 확산되었다.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 교회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며, 바르나바의 유해 발견을 계기로 제논 황제로부터 여러 특권을 부여받았다.[5]

이후 아랍의 침략으로 다르다넬스로 피신하기도 했으나, 퀴니섹스툼 공의회에서 관구 대주교의 지위와 특권을 재확인받았다.[5] 키프로스 왕국 시대에는 가톨릭 왕들의 탄압을 받았지만, 파마구스타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에 따른 혜택을 누리며 성 요르요스 대성당을 건립하는 등 정교회 신앙을 유지했다.[1]

1571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키프로스 정교회는 유일한 합법적 교회로 인정받았고, 밀레트 제도를 통해 종교적 자유와 자치권을 얻었다.[1] 그러나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 키프로스 정교회 지도자들이 처형당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1]

1878년 영국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종교적 자유가 확대되었지만, 교회 운영에 대한 간섭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50년 마카리오스 3세가 관구 대주교로 선출된 후, 키프로스 정교회는 민족 운동과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

1960년 키프로스 독립 이후에도 교회는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터키의 침공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많은 성당과 문화유산이 파괴되거나 약탈당했다.[17][18][19]

1977년 흐리소스토모스 1세가 관구 대주교로 선출된 후, 1979년 새 권리 헌장이 작성되었다.[9] 2006년에는 흐리소스토모스 2세가 관구 대주교로 선출되었다.[9]

2. 1. 로마 시대

사도 바울로바르나바, 그리고 바르나바의 친척인 복음사가 마르코와 함께 서기 45년에 키프로스에 와서 기독교를 전파했다.[2][3][4] 살라미스에 도착한 그들은 섬을 가로질러 파포스로 가서 그곳의 로마 총독 세르기우스 파울루스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로마의 집정관 세르기우스 파울루스는 최초의 기독교 통치자가 되었으며, 키프로스는 기독교 지도자가 통치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2][3][4] 서기 50년, 바르나바는 마르코와 함께 키프로스를 다시 찾아 살라미스를 자신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는 키프로스의 초대 주교로 여겨진다.

키티온의 주교 라자로, 타마소스의 주교 이라클레이디오스, 솔로이의 주교 아브시비오스, 키레니아의 주교 테오도토스 등이 키프로스섬에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공헌했다.

4세기 말 무렵, 기독교는 키프로스섬 전역에 널리 퍼졌다. 이 때 키프로스의 주교는 에피파니오였으며, 주교좌는 살라미스(나중에 콘스탄티아로 개명됨)에 있었다.

2. 2. 비잔틴 시대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논 황제의 칙령에 따라 키프로스 교회의 독립이 승인되었다.[5] 에페소스 공의회가 소집되기 전에 안티오키아 총대주교가 키프로스 교회의 독립권을 폐지하려고 하자 키프로스의 사제단이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공의회는 키프로스 교회의 독립권을 규범 제8조로 비준했다. "만약 ... 안티오키아 주교가 키프로스에서 서임을 거행하는 것이 ... 고대 관습이 아니었다면, 키프로스 고위 성직자들은 [그들의 섬에 대한] 주교 서임을 스스로 수행할 권리를 ... 누릴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5]

478년 키프로스 관구 대주교 안테미오스는 환시를 체험한 후, 바르나바의 무덤과 그의 성해를 발견했다. 성인의 가슴 부위에는 마태오 복음서 사본이 놓여 있었다.[5] 교회의 설립자로 전해진 바르나바의 성해 발굴로 키프로스 교회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설득력을 얻어 황제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제논은 키프로스 교회의 위상을 확인하고 관구 대주교에게 다음의 세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5]

  • 진사가 들어간 주홍색 잉크로 서명
  • 전례복 속에 검은색 장삼 대신에 비싼 염료가 들어간 자줏빛 옷을 착용
  • 주교 지팡이 대신에 왕홀을 사용


수백 년이 흘러 키프로스는 아랍의 침략에 크게 시달렸으며, 유스티니아노스 2세 재위기간 동안 콘스탄티아와 쿠리온, 파포스 등이 약탈당했다. 황제의 권고에 따라 관구 대주교는 생존자들과 함께 다르다넬스로 피신해 키지코스 인근의 에르데크에서 황제의 이름을 따서 노바 유스티니아나(Νέα Ιουστινιανή|네아 유스티니아네el)라는 도시를 세웠다. 692년 퀴니섹스툼 공의회는 망명자가 된 관구 대주교의 지위와 특권을 재확인했으며, 698년 아랍인들이 키프로스에서 쫓겨나자 관구 대주교는 다시 돌아와 '''노바 유스티니아나와 키프로스 전역의 관구 대주교'''라는 직함을 보유하여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5]

2. 3. 십자군 시대

키프로스 왕국 수립 후, 가톨릭 왕들은 정교회 주교의 숫자를 14명에서 4명으로 줄이고 나머지를 추방했다. 관구 대주교는 니코시아에서 모르푸 인근의 소리아 지역으로, 라르나카의 주교는 레프카라 마을로 각각 거처를 옮겨야 했다. 남아있는 정교회 주교들은 교계제도상 해당 지역의 가톨릭 주교들의 밑에 있었다. 더 나아가 여러 수도원들의 재산도 몰수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키프로스 그리스인들의 신앙을 바꾸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초반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는 점차 평화롭게 공존하게 되었다.[1] 정교회 신자들은 키프로스, 특히 파마구스타의 경제 발전에 따른 몇 가지 혜택을 같이 받았다.[1] 정교회 성 요르요스 대성당(현재 폐허 상태)은 근처에 있는 가톨릭 성 니콜라오 대성당(1571년 이후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이용)만큼 높고 기념비적 건물로 세워졌으며, 고딕 건축과 비잔티움 건축의 융합이 일어나기도 했다.[1]

2. 4. 오스만 시대

1571년 오스만 제국키프로스를 정복하면서 정교회는 키프로스의 유일한 합법적 교회로 인정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정교회를 기독교 신자들의 대표자로 간주했으며, 세금 징수 책임을 맡겼다. 특히 세금과 관련하여 무슬림과 비무슬림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정책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도 했다.[1]

오스만 제국 통치기에 키프로스 교회의 위상은 밀레트 제도 실행으로 크게 상승하였다. 밀레트 제도는 각 종교 공동체가 해당 지역의 행정 관리에게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제도였다. 오스만 제국은 라틴인들의 영향력은 감소시키려 한 반면, 키프로스 정교회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다루어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오스만 제국은 성당의 안전을 보장하여 자유로운 종교 생활을 허락했고, 집과 땅을 구입해 상속할 수 있는 권리도 주었으며, 키프로스 섬의 다른 기독교 교파들에 대한 정교회의 우월권을 인정했다.[1]

이후 교회는 세속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19세기 초반에는 관구 대주교가 키프로스의 재정을 장악해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1804년 수도와 인접한 부락에서 터키인들이 식량 부족에 직면하자 관구 대주교에게 항의하는 시위를 처음으로 조직했다. 이는 우연히 일부 오스만군이 수송 중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고, 곧 진정되어 다시 예전의 일상생활로 돌아갔다.[1]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키프로스의 그리스인들은 이에 동참하였다. 그러자 퀴취크 메흐메트 등은 이들을 선동한 주교들과 키프로스의 그리스인 평신도 지도자들을 고발했다. 그리하여 키프로스의 키프리아노스 관구 대주교와 파포스와 키티온, 키레니아의 주교들이 기타 주요 성직자 및 시민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키프리아노스 관구 대주교와 그의 수석보제는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주교 세 명은 참수되었고, 주요 인사들은 예니체리로 징병되었다. 키프로스 정교회는 재량권 남용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사건은 키프로스 정교회와 오스만 정부 사이에 일어난 최악의 사건이었으며, 양측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틀어진 계기가 되었다.[1]

2. 5. 영국 식민지 시대

1878년 영국이 키프로스를 매입하면서 오스만 제국 시절 금지됐던 성당 타종 허가 등 더 많은 종교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로 이슬람교로 개종했던 일부 키프로스 주민들이 다시 정교회로 개종하기도 했다.[1] 이와 거의 동시에 관구 대주교직 승계에 대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관구 대주교 후보였던 키릴로스 2세와 키릴로스 3세는 주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는데, 전자는 민족주의자였고 후자는 온건파였다.[1]

영국 통치기에 교회가 더 많은 자유를 누렸지만, 영국 행정부는 사안에 따라 교회 운영 및 기타 문화 활동 분야에 개입하기도 했다.[2] 이로 인해 1931년 10월 키프로스 입법회의 일원이기도 한 주교들의 주도로 폭동이 일어났다.[2] 반란을 일으킨 죄목으로 키티온의 니코데모스 주교와 키레니아의 마카리오스 주교는 유배되었고, 관구 대주교 선출이 규제되었다.[2] 그 결과, 키릴로스 3세 관구 대주교가 안식한 1933년부터 파포스와 레온티오스의 주교가 새 관구 대주교로 선출된 1946년까지 관구 대주교직은 공석 상태였다.[2]

1950년 마카리오스 3세가 관구 대주교로 선출되었다.[3] 그는 매우 지적인 인물로, 키티온의 주교로 있던 시절 민족운동을 전개했다.[3] 1949년 사도 바르나바 신학교를 세웠으며, 1950년에는 키프로스와 그리스의 합병안에 대한 국민 투표를 이끌었다.[3] 마카리오스 3세는 관구 대주교 시절 1955년부터 1959년까지 EOKA 해방운동의 정치 지도자였다.[3] 영국은 이러한 그의 활동을 문제 삼아 그를 세이셸로 추방했다.[3]

2. 6. 키프로스 독립

1960년, 마카리오스 3세 관구 대주교가 새로 건국된 키프로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 그러나 마카리오스가 파포스, 키티온, 키레니아의 세 주교들과 불화를 겪으면서 교회 내부에서 1972-73년 키프로스 교회 쿠데타 시도가 벌어지게 되었다.[3] 이들은 마카리오스를 넘어뜨리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적발되어 쫓겨났다.[1] 이후 키티온 교구에서 리마솔 교구가, 키레니아 교구에서 모르푸 교구가 분리 신설되었다.[1] 1974년 7월 15일 쿠데타로 마카리오스 3세는 키프로스 섬에서 쫓겨났으나,[1] 1974년 12월에 다시 귀국했다.[1]

2. 7. 터키의 침공

터키의 침공으로 키프로스 정교회는 큰 시련을 겪었다. 키프로스 영토의 35%가 터키군에 점령되면서 수십만 명의 정교회 신자가 피난길에 올랐고(1차적으로 2만 명), 2001년 5월 기준으로 북키프로스에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 421명과 마론파 155명만이 남게 되었다.

키프로스 정교회는 교회와 성화가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17] 비잔티움 양식의 성화, 프레스코화, 모자이크는 물론 많은 성당이 약탈되어 암거래 시장에 팔렸다. 대표적인 사례는 6세기경 카나카리아에서 제작된 파나기아(Panagia) 성모 이콘으로, 미국 인디애나 폴리스 법원의 판결을 통해 키프로스 정교회가 환수받았다.[18] 북키프로스에는 514채의 성당, 경당, 수도원이 모스크나 박물관으로 전환되거나 방치되었다.[19]

2. 8. 근황

흐리소스토모스 1세는 1977년 8월 3일 마카리오스 3세의 뒤를 이어 대주교가 되었다. 1979년, 키프로스 정교회는 1914년의 기존 헌장을 대체하는 새 권리 헌장을 작성하고 승인했다.[9]

흐리소스토모스 1세는 말년에 알츠하이머병을 앓아 수년간 주교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2006년 5월,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교회 원로 회의를 주재하여 흐리소스토모스 1세에게 명예로운 은퇴를 요청했다.[9]

오랜 선거 끝에 2006년 11월 5일, 파포스의 수도 대주교였던 흐리소스토모스(65세)가 새 관구 대주교로 선출되어 흐리소스토모스 2세가 되었다.[9]

흐리소스토모스 2세가 사망한 후, 2022년 키프로스 대주교 선거가 치러져 그의 후임자를 선출했다.[9][10]

3. 행정과 시노드

키프로스 정교회 시노드는 키프로스 정교회의 최고 의결 기구로서, 키프로스 정교회와 관련된 모든 사안을 검토하고 처리한다.

니코시아 대주교 궁전


키프로스 정교회 성 시노드는 키프로스 최고 교회 권위 기구이다. 성 시노드는 키프로스 교회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검토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현재 시노드 의장은 게오르기오스 3세이며, 신 유스티니아나와 모든 키프로스대주교를 겸임하고 있다.[1]

4. 키프로스의 종교 유적

트로오도스 산맥에 있는 9개의 비잔틴 교회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키코스 수도원은 키코티사 성상, 즉 어머니 무릎에서 기쁨에 차 발길질을 하는 아기 예수의 독특한 모습을 보관하는 곳이다.

키레니아 성 메트로폴리탄 주교구와 섬 북부의 터키 점령 지역에 있는 파나지아 아시누 교회에서 밀반출된 성상은 2007년 미국의 한 수집가에 의해 반환되었다. 섬 분단 이전, 훨씬 더 일찍 도난당한 칼로파나이오티스 마을의 성상 역시 교회의 관할로 반환되었다.

1974년 이후 약탈자들이 약 15,000~20,000개의 성상, 6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수십 개의 주요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 수천 개의 성배, 나무 조각, 십자가, 성경을 약탈한 것으로 추산된다. 키프로스 자율 교회와 키프로스 공화국이 이러한 유물 중 일부를 반환하려는 노력은 1998년 고고학 잡지에 실렸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분실된 상태이다.

수도 니코시아에 있는 크리살리니오티사 '황금 아마의 성모', 파나지아 크리소스필리오티사 '황금 동굴의 성모' 교회와 대천사 미카엘 트리피오티스 교회는 막카리오스 3세 대주교 재단 비잔틴 박물관과 함께 방문객을 위해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수도원은 별도로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CNEWA - Orthodox Church of Cyprus https://web.archive.[...]
[2] 웹사이트 Cyprus: An Island Rich in Christian Tradition https://cnewa.org/ma[...] 2021-04-23
[3] 웹사이트 History of Church of Paphos http://www.impaphou.[...] 2021-04-23
[4] 웹사이트 The beginnings of Christianity in Cyprus. Religious and cultural aspects https://www.research[...]
[5] 논문 The Claim of Antioch to Ecclesiastical Jurisdiction over Cyprus https://www.jstor.or[...] 1958
[6] 논문 An Introduction to the Issue of Preserving Cultural Heritage http://www.brown.edu[...] 2010-01-19
[7] 논문 Autocephalous Greek-Orthodox Church of Cyprus v. Goldberg & Feldman Fine Arts, Inc. 1992-01
[8] 뉴스 Shame of Cyprus' looted churches http://news.bbc.co.u[...] 2007-01-29
[9] 웹사이트 Στις 18 Δεκεμβρίου 2022 οι Αρχιεπισκοπικές εκλογές, για πρώτη φορά ψηφοδέλτιο https://www.alphanew[...] 2022-11-14
[10] 웹사이트 Archbishop elections on December 18 (Update 3) {{!}} Cyprus Mail https://cyprus-mail.[...] 2022-11-15
[11] 뉴스 Cyprus News Agency: News in English, 11-11-20 http://www.hri.org/n[...]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웹사이트 CNEWA - Orthodox Church of Cyprus https://web.archive.[...]
[17] 저널 An Introduction to the Issue of Preserving Cultural Heritage http://brown.edu/Dep[...] 2010-01-19
[18] 저널 Autocephalous Greek-Orthodox Church of Cyrprus v. Goldberg & Feldman Fine Arts, Inc. 1992-01
[19] 뉴스 Shame of Cyprus' looted churches http://news.bbc.co.u[...] 2007-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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